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21

6월

이하展 1:3비평_이빛나

2015 비평가 레지던시 사유게르

2015년 대안공간 아트포럼리에서 진행되는 <비평가 레지던시_사유게르 프로젝트>는 20-30대 젊은 청년 비평가들이 수년간 탐구해온 예술에 대한 시각들을 개인의 사적인 페이지가 아닌 공식적인 자료화에 대한 필요성에 의해 기획되었습니다. 그 첫번째 프로젝트로 2015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현장전으로 열리는 이하 작가의 전시에 1:3비평글이 완성 되었는데요. 이 글이 작가에게도, 작가의 관람객에게도 의미있는 작용이 될 것 같습니다. 아울러 비평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꿈꾸는 젊은 비평가들과 그들의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곧 펼쳐치는 이하 작가의 전시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무용성

■이빛나 (미술평론)

작가 이하의 작업-히틀러 차림의 이명박 전 대통령, 개를 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등-은 공공장소에 걸리면 경찰이 출동하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면 관장이 작업을 부분적으로 가리거나 아예 벽에서 내려버린다. 곧이어 기자들이 몰려들고, 작가는 검찰에 소환된다. 이러한 정치 풍자화를 그리거나 그것을 포스터 형식으로 제작해 일반인들에게 배포하는 이하의 작업은 작가에게 또는 작가의 포스터를 특정 장소에 부착한 일반인에게 법적 처벌 “朴대통령 풍자 포스터 금지장소에 부착 30대 입건” 아시아 투데이 김종길 기자, 2015. 5 26.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40526010011695
이 내려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작가는 그 가당찮은 ‘불법’ 행위에 부과된 벌금 10만 원을 수락하지 않고, 그것의 몇 십 배의 돈을 써가며 법과 권력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 폭력에 항거하고 있다.
이하는 2011년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북한의 김정일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정치인들을 만화 캐릭터로 묘사한 작업-를 시작으로 세월호 침몰과 같은 참혹한 현실 안에서 비탄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을 조소하는 등 작업을 통해 작가-주체의 정치적 투쟁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들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파급되어 ‘현실’에 공감하고, 구조적 폭력에 맞서려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가령 페이스북에서는 이하의 작업에 ‘응답’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일반인들이 작가의 정치적 행보에 참여함으로써 궁극적인 주체를 출현시킨다. 즉 그들의 정치적 움직임은 작가의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에는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발현되는 역동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역동성은 국가 시스템에 의해 차단되며, 권력이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개인에게 ‘건축물 불법 난입’, ‘쓰레기 무단투기’, ‘퇴거불응’이라는-‘예술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죄목을 씌운다. 요컨대 민주주의 안에서 정치란 국민의 사회적 분노와 감동을 표현하고, 갈등과 불화를 소통의 시작으로 삼으며, 개인과 사회의 형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나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민의 사회적 발화행위에 대하여 검열 장치(법)를 들이대 그와 ‘다른’ 목소리는 소음으로 치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 폭력에 맞서기 위해, 정당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위해 스무 번 이상 파출소를 드나드는 이하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한 개인의 불굴의 의지로써 찬탄 받아 마땅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작과 동시에 결과가 뻔히 보이는 작업을 매번 새로운 듯 재개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처음에 검찰 조사, 구속, 항소와 같은 목숨을 건 “액티비티”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업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정치적 인물과 사건을 통해 작가의 정치색이 확연히 드러나다 보니 검찰 및 보수 언론에서 작가가 구현하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적 규범으로 제지하려 드는 것은 작가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정치적 발화를 위해 국가의 압제를 운용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정치적 행위가 ‘작업 배포-검찰 소환-항소’라는 일정한 패턴 안에서 재생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 작업 재개 후 수반되는 ‘법적 제재’는 작업에 반드시 포함되는 ‘필수항목’이 되었다.
하여, 본 글에서는 이하의 동어 반복적인 정치적 발화가 갖는 양가성, 그 ‘무용無用한 능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뻔한’ 관념(욕망)과 표현(언어)
앞서 서술했듯, 이하는 정치 풍자화/포스터를 제작하고 대량 복사해 언론사 앞이나 버스 정류장, 건물의 옥상이나 거리 한복판, 심지어 ‘접근 금지’라고 명시돼 있는 장소의 벽에 인쇄물을 부착한다. 그 수많은 벽 위로 수갑을 찬 채 29만 원 자기앞 수표를 쥐고 있는 전 대통령(전두환), G20 정상회의 공식 포스터 속 쥐(이명박), 박정희 얼굴이 찍힌 (독)사과를 들고 있는 백설공주(박근혜)<귀여운 독재자 시리즈>가 우스꽝스럽게 걸린다. 이를 본 지나가던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작가를 격려하며, 더 ‘좋은’ 벽을 알려주기도 하고, 다른 이는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나무라며, 오히려 자기가 겁을 먹기도 한다. 이렇듯 작업은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감정을 표출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작가/작업에 다가가 말을 건네는 그 순간부터 예술(정치)의 참여는 시작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반응’은 작가의 ‘표현’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는 백범 김구, 김근태, 노무현의 모습을 처연하게 담고 있는 <눈물 시리즈>와는 판이하다. 작가는 누가 봐도 ‘좌’ 측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보수정권을 비난하고, 진보정권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정치적 입장을 표방함에 있어 발생하는 결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사용하는 이분법적 잣대는 현 정권의 행태를 고발하는 데도 좌익이 도모하려는 변화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데도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작가는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와 <눈물 시리즈>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적 방향을 피력하기 위해 이미지의 극단적인 대비(이명박=히틀러, 노무현=체 게바라)를 사용하여 우익과 좌익을 명백히 구분 짓는다. 설사 각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유사한 성격으로 묶인다 하더라도 그 두 그룹으로 분리된 인물들의 정치적 행위가 언제나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업은 작가의 첨예하고 예외적인 정치적 관점을 드러내기보다 보편적 ‘대의’에 매달려 간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작가가 이러한 정치적 작업을 계속하는 가장 큰 동인은 정부에 의해 방치되고, 은폐되어 늘 피해자의 위치를 점하는 개인과 집단의 목소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예술가로서의 책무이다. 그리고 그 말 하고 싶은 바를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작가의 작업으로 하여금 (일시적인) 위안과 (일말의) 희망을 얻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작업이 쉽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이하의 작업은 여느 정치 풍자화와 다를 바 없는 특정 인물과 사건의 단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단일하고 명확한 작가의 정치적 입장이, 판단을 위한 거리가 확보될 수 없는 초근접 시선이 그의 정치적 “올바름”을 오염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현시점에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뻔함’의 역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하의 작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뻔하고 소모적인 여정 (포스터 제작 및 배포→검찰 소환→항소)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그 정치적 퍼포먼스는 현실에서 어떠한 실질적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나마 변화라고 한다면 파출소에 들락거리는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작가에게 부과되는 벌금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것. 사정은 이하의 작업에 참여한 페이스북 “자원봉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무권력의) 개인이 정치적 발화(현 정권에 대한 비판)를 할 때마다 빈곤하고, 피폐해져 가(야하)는 우리의 ‘현실’을 여실히 투영하고 있다.
이러한 ‘무한 도전’은 작가의 경우에는 완성된 그림(포스터) 바깥에서, 일반인 자원봉사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주기적 일상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일면식도 없는,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각자의 틀(권력에 의해 배정된 개인의 자리)을 넘어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없는 시간을 가”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p.11.
짐으로써 창안하는 예술적/정치적 삶이라 할 수 있다. 그 예술적/정치적 삶이란 작가와 관람객의 구별,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가 무화되는 지점에서 ‘창의적 불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는 바로 작가가 이름 붙인 “다단계 예술”이다. SNS를 통해 일반인 “자원봉사자”들이 만들어가는 그 예술은 오롯이 능동적인 의지와 의식만으로 (일시적인) 공동체를 이룬다. 그것은 “사회와 공동체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익숙한 형태의 공동체도 체계적 형태의 사회도 아닌” 심보선, 「예술과 공동체」,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pp.75-77.
그 어디에도 포획되지 않는 관계를 생성해 낸다. 비록 이미-항상 실패를 전제하는 ‘무용한 역량’일지언정, 그것은 체계에 균열을 내고, 체계와 다른 목소리를 기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Submit a Comment